5월의 구름

<우작>을 만들었던 터키 출신의 세일란의 <5월의 구름>에는 체호프에 대한 경배가 등장한다. 나도 뒤늦게 나마 체호프의 책을 구해서 읽어보았다. 영화는 지루했지만 간혹 놀랄만한 장면이 등장했는데 왠지 체호프의 단편에서도 이런 순간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뭐 기대는 기대에 그쳤다. (오해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건 체호프를 들먹거린 감독에 대한 비아냥이다) 체호프의 유머는 사람을 잔뜩 기대시켜 놓고 허탈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는데 <5월의 구름>은 그런 종류의 영화는 분명히 아니었다.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과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아버지, 무언가를 욕망하는 아이.. <5월의 구름>이 체호프를 이해한다면 그건 순전히 그 '무언가'가 불가해하다는 사실에 그친다. 그러나 관객과 독자의 반응은 상반된다. 독자들은 짧은 희열을 느끼며 담배를 피겠지만 관객은 지루해할 가능성이 크다. 이건 공갈이 아니다.

아핏차퐁 위타세타쿤 영화의 미학



잠자는 사람들은 서로 분리된 세계 속에 있으며
깨어있는 자들은 하나의 같은 세계 속에 있다
-헤라클레이토스

영화는 인간 영혼과 기계 영혼의 언어 사이의 첫 혼합물이다.
-폴 비릴리오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은 깨어있는 세계와 몽환적인 세계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결코 늦추지 않았다. 영화 테크놀로지는 그 속성 상 스크린을 통해 이런 두 가지 이질적인 영역이 합치되는 과정을 상연한다. 영화 이미지, 영화 속의 대상들은 비록 만질 수는 없지만 우리 앞에 현존하는 것들이다. 영화는 지금까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대상들에게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며 사유의 영역을 확장해 왔다고 평가 받아 왔다. 그러나 영화의 이러한 가능성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여지가 다분했는데 실재로 영화의 역사는 이런 오해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하다. 테크놀로지의 욕망과 혼동되는 영화적 욕망은 완전한 세계의 모습을 프레임 안에 담으려는 시도를 선택하고 현실과 가상을 카메라라는 매개 장치로 ‘상호 번역’하는 것에 머물고 말았다.

영화의 발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베르그송이 영화적 사고를 기계적 사고, 기계적 사유의 산물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베르그송이 기성복이란 은유로 묘사한 기계적 목적론은 모든 요소가 갇힌 상태 혹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실재를 작은 조각들로 분해하는 사유 방식을 말한다. 이에 대해 그가 제안하는 과학은 실재적인 것을 양과 질로 구분하고 전자는 물체들의 설명을, 후자는 영혼의 설명으로 역할을 분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의 철학에 대한 오해로 ‘영화적 사고’라는 개념은 자칫 사장될 수도 있었다. 들뢰즈가 어느 정도 영화 자체와 베르그송의 철학을 복권시켰겠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발명을 지켜본 베르그송의 혜안이 아직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태국 출신의 감독인 아핏차퐁 위타세타쿤은 영화 장치가 가진 이러한 딜레마를 ‘영민하게’ 전유하는 작가이다. 태국 출신의 이 감독에게 ‘미국에서 공부한 3세계 실험 영화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버릴 위험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특히 그 자신이 앤디 워홀과 같은 실험영화 감독을 선호한다고 말할때 이런 위험은 극에 달한다. 앤디 워홀이 영악하게 사진은 “현실을 번역”한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아핏차퐁이 자신의 작품으로 이 진술에 동의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연쇄인 영화 이미지들은 현실에 대한 단순한 번역은 차치하고 좀 더 심원한 시간을 다룰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앤디 워홀은 시간이 개입하지 않는 사진보다 더욱 영민하게 영화 <엠파이어>를 만들었는데 8시간에 달하는 물리적 폭력을 관객에게 행사함으로써 운동-시간에 기인하는 영화적 쾌락을 시간에 기인한 순수한 영화적 폭력으로 대치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내었다. 아핏차퐁이 앤디 워홀에 공감하는 부분은 영화가 재현하는 것이 현실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효과는 베르그송이 영화적 시간이라고 폄하했던 것을 경유해서 가능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핏차퐁의 영화들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동력은 모더니즘 작가의 계보에 그를 위치지움으로써 얻어지는 오리엔탈리즘의 효과가 아니라 그 자신이 실험영화의 전통을 전략적으로 전유한 결과이다. <정오의 수상한 물체>(이후 ‘정오’)에서 <친애하는 당신>, <열대병>으로 이어지는 장편영화들과 16mm 단편,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와 영화, 뉴미디어, 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협업 작업을 거친 그는 그 다양성 만큼이나 다양한 전략을 사용한다.

<열대병>은 모든 면에서 앞선 작품들을 ‘포괄’한다. 이것은 이 영화가 가진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 시공간을 공유하는 그의 영화들이 가지는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열대병>을 중심으로 <친애하는 당신>과 <정오>를 다루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데 적합할 것 같다. 또한 부끄럽지만 그의 비디오 작업들과 단편들을 모두 보지 못한 것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유혹의 영화-영화의 동력

아핏차퐁 영화에서 크래딧은 모순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극영화의 크래딧은 영화의 서명으로써의 기능과 현실과 영화 사이에 머물러 있는 관객을 영화적 공간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 위한 의례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친애하는 당신>의 오픈 크래딧은 영화가 진행된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올라오며 <열대병>은 ‘캉’이 관객을 향해 던지는 침묵의 시선으로 처리되었다. 또한 <정오>는 이동의 크래딧을 상연한다.
90여분에 달하는 영화에서 크래딧은 하나의 특이점을 형성한다. 손가락 지문에서 특이점이 개별적인 개인들을 구별해주는 서명 같은 것이라면, 영화에서 크래딧은 작가의 서명이자 영화관에 들어선 관객들을 영화의 내러티브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유혹의 순간이 될 것이다. 아핏차퐁에게 있어서 이 특이점은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고 유혹하기 위한 노골적인 제스츄어처럼 보인다.
그가 <열대병>을 “응시의 영화”라고 언급한 것은 영화에서 본다는 것이 사진이나 회화와는 다르게 육화되고 의미화된 행위이며 관객과 영화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미화 과정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열대병>은 유혹의 영화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인물들 간의 유혹에 의존한다. 영화 초반부 농장의 식사 장면에서부터 커플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를 유혹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대병>의 오픈 크래딧은 ‘캉’이 관객을 유혹하는 시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시선의 종착점은 내러티브 상으로 그 짝이 보존되어 있는 다른 유혹의 시선과는 차별되게 노골적으로 관객을 향해 있다. 영화 안에 유혹의 담지자가 있는 것처럼 유혹 당하는 관객 역시 감독의 의도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유혹을 받아 내야 할 관객, 그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을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핏차퐁은 자국 내에서 겪는 소외의 감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태국 영화계와 정부에게서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감정의 진위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태도로 인해 그의 영화의 말걸기 대상이 자국 관객이 아닌 1세계 관객으로 제한되었으며 그 양식이 자신의 영화 속에 투영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가 관객으로 설정한 대상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1세계 관객들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이해와 감독에 대한 그것이 언제나 동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열대병>은 영문으로는 ‘Tropical Malady’(열대병)이지만 동시에 태국어로는 ‘Sud Pralat’(이상한 동물)로 번역된다. 이 번역 불가능한 간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이 두 제목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는 어느 누구보다 태국과 태국의 영화 문화를 자신의 영화적 재료로 ‘열심히’ 활용한다. <열대병>이 칸느에서 상영되었을때 태국의 박스 오피스를 점령했던 작품은 인간-야수가 등장하는 공포물이었다. <열대병>에서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비한 존재는 태국의 전통 민담에서는 흔하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물 변신이 태국적 애니미즘이나 그리스 신화의 오비디우스적 동물 변신의 맥락을 차용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동물 변신은 그 본질 상 일상적인 경험의 논리와는 모순된다. 그의 영화에서 동물 변신의 내러티브는 영화 자체가 가지는 속성, 즉 일상적인 경험과는 차별되고 모순되는 경험 때문에 등장 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경험은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동물 변신은 현실에서는 모순이지만 영화를 통해 (특히 태국 안에서는) 그 어떤 내러티브보다 물질화된 상태의 것이다. 그가 동물 변신으로 전유한 것은 그것이 가진 바로 그 애매한 비결정성, 일상 생활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다는 사실과 (영화를 통해) 현실화 된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 현실화는 영화를 경유함으로써만 얻어질 뿐만 아니라 또 특정한 문화적 참조(태국의 블록 버스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아핏차퐁의 영화 속 이미지를 추동하는 것은 유혹과 그 유혹을 가능하게 하는 부정不貞한 계기들이다. 그리고 그 부정함은 아핏차퐁이 유혹한 1세계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부정함은 흔히 성적性的 느슨함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정오>에서는 도망친 아내를 찾아 나서는 남성의 이야기로, <친애하는 당신>에서는 밀림에서의 성행위로, <열대병>에서는 ‘통’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분절된다. 이 부정함은 빌헬름 라이히의 성해방 논의, 즉 성의 억압이 사회적인 억압 기제로 작동해왔으며 성의 해방이 이런 억압 기제에 대한 저항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논의에 대해 푸코가 저항한 서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푸코는 라이히의 주장이 ‘순수한 성’이라는 개념을 내재하고 있으며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설정한 성 해방 역시 환상적인 영역에 머무르기 때문에 기존의 성 정치의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핏차퐁이 자국 내에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주장은 일견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한 것은 <친애하는 당신>에 벌거벗은 두 남녀의 정사 장면이 삽입되었다는 이유로 태국에서 불법 DVD가 출시된 사실이다. 감독 자신은 불완전한 그 판본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이 해프닝은 관객들이 이 작품에 대해 관음증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항적 성 정치의 영역에서는 어떤가? <열대병>은 전통적인 성 정치에 대해 급진적인 퀴어 시네마의 저항을 전유하고 급진적인 1세계 영화학자에게 좋은 이야기거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러한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캉’은 방콕의 동성애자들과 눈빛을 교환하면서 ‘통’과 즐거운 데이트를 하지만 ‘통’은 깊은 밀림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친애하는 당신>에서 밀림 속 정사는 자연 속에서의 저항의 의미가 아니라 방콕에서 추방당한 이들이 얕은 밀림에서 벌이는 ‘추잡한’ 정사로 읽혀진다. 아핏차퐁의 영화들이 가진 부정함과 그 효과는 그의 영화를 특정한 지역의 정치적 성향으로 환원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태국 국민들의 관음증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아핏차퐁이 자국 내에서 기꺼이 관음증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그의 영화들이 “성해방과 국가 제도의 성정치” 양자를 교묘하게 회피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아핏차퐁 위타세타쿤은 꿈꾸는 자가 아니다. 단지 꿈꾸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캉’이 ‘통’을 더듬어 쫓으면서 매순간 자신의 인상을 유동적인 영화 이미지 속에 각인시키고 있는 한 이러한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그 둘이 어둠 속에서 만나는 순간, 관객들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한다. 관객들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두가지 속도

<열대병>은 동물성을 잠재한 ‘통’과 도시적 감수성의 ‘캉’ 사이의 로맨스를 내러티브로 채택하면서 태국 전통 문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오비디우스적 동물 변신을 전유한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특히 남성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부여받지 못한다. <친애하는 당신>에서 버마에서 온 불법 노동자 ‘민’은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며 병원을 찾는데 노동 허가증에 필요한 건강 진단을 받지 못한다. 노동을 할 수 없는 환경은 <열대병>에서는 ‘통’의 문맹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작품들이 가지는 정치성은 결코 이슈화되진 못했다. 그의 영화는 세계화가 추동한 문제 자체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느 누구도 이 영화가 ‘정치적’이라고 언급하진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언술로 환원될 영화를 만드는 것을 기피하는 감독의 성향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그의 영화가 가지는 폭발적인 힘, 관객을 탈진시키는 계기는 정치적 언술이 의존하는 적대의 개념 보다 그들의 질적 차이가 만들어 내는 순간적인 폭발(베르그송이 유탄의 폭발에 비유했던 내부의 폭발적 힘과 그것에 저항하는 물리적 한계)과 그 효과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핏차퐁은 <친애하는 당신>의 구상을 동물원에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어느 버마 불법 노동자가 잡혀 가는 사건을 목격하면서 구상한 것이다. 동물원 관람객이었던 그가 세계화가 상연한 퍼포먼스의 관객으로 전이되었다. 동시에 그는 이 퍼포먼스에서 어떤 위기감을 느꼈다. 평소 자국에서 느꼈던 소외감으로 인해 그 자신이 버마에서 온 불법 이민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이 영화를 설명하는 글에서 그는 불법 노동자들도 동물원에서 행복할 권리가 있을 거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해 그들을 위한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진 않았다. 밀림이 가진 물질성이 ‘마음의 반영’이 되면서 이 장소는 물리적인 조건을 잃어버린다. 영화를 만드는 것 역시 노동의 일종이다. 그러나 그는 태국 내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에 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태국 안에서 만든 ‘상품’을 가지고 해외 영화제를 도는 ‘여행객’에 가깝다. 그의 영화가 속도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그것에 있을 것이다.

폴 비릴리오를 경유하며 레이 쵸우는 미디어의 속도에 대해 언급을 한다. 그녀에게 형식주의적인 시간의 전유는 폭력적인 속도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며 생산적인 독해에서는 윤리적인 선택으로 귀결될 수 있다. 아핏차퐁 역시 형식에 집착하는 감독이다. 그의 부자연스러운 형식은 밀림과 방콕이라는 거대한 세트에 다른 시간성을 부여했다. 이 시간들에 대한 최선의 해석은 1세계와 3세계 / 현실과 환상 / 기계와 영혼 등으로 무수하게 분절되는 대립적인 계열들이다. 그러나 속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둘은 결코 대립적인 개념은 아니다. 비릴리오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밀림과 방콕은 다른 속도를 가진 공간일 뿐이다. <열대병>은 태국 사회가 공유하는 애니미즘이 전면화 되지만 그것보다는 비릴리오적인 독해가 더욱 적합한 영화이다. 그것이 ‘열대병’과 ‘이상한 동물’의 간극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내부의 간격도 그렇다. <열대병>이 두 개의 영화로 나눠지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속도의 충돌이 만들어낸 부재의 결과이다. ‘캉’과 ‘통’으로 대변되는 방콕과 밀림은 영화 속에서 계속 화해를 이끌어내듯이 보이지만 결국 ‘통’은 사라지며 ‘캉’은 그를 뒤쫓는다. <친애하는 당신>의 크래딧도 진부한 도시의 일상과 밀림으로의 소풍이라는 두 가지 다른 속도를 구분해주는 분기점으로 기능한다.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불법 이민자들은 신체적인 외상을 통해 사회적인 매커니즘을 드러낸다. 이들은 자신들이 밀림에서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데 이것은 방콕이 가진 속도,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의해 추동되는 속도의 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이다.
<정오> 역시 이질적인 두 속도가 편재해 있는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이라는 두 가지 다른 속도. 그의 필모 그라피에서 이 작품이 앞에 위치하는 것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러나 <정오>에서 <열대병>에 이르는 그의 작품들은 일종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에게 다큐멘터리는 영화 장르라기 보다 영화가 관객에게 부여하는 현실 그 자체가 된다. <정오>는 이미지가 가지는 물질적인 힘을 묻는 영화이다. 그것은 장르 자체로써 보장받는 영화적 현실이 아니라 아핏차퐁이 영화의 속성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다큐멘터리적인 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효과이다. 영화는 진실을 담지하는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다큐에서 멀어져야 된다라는 것을 <정오>는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결론: 해피엔딩

처음에는 눈치를 봐야 할 일도 많지만 일단 크게 성공을 거두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 않나. 그때는 치사하게 굴어도 된다. 이런 게 해피엔딩 아닐까.
(인터뷰)

왜 영화는 현실적일 수 없는 자신의 소명 속에 무리하게 현실을 기입하려고 했을까? 이것은 <정오>가 천착하는 문제이자 아핏차퐁이 영화의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는 <친애하는 당신>과 <열대병>에서 관객의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영화적 사건이 만들어 내는 폭발적인 순간으로 관객을 매료시킨다.

위의 인터뷰는 그가 왜 그렇게 겸손한지 (무슨 눈치를 본다는 말인지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니면 그의 영화가 왜 항상 우회의 순간을 거치는지를 설명해준다. 또한 이 귀여운 야심은 아핏차퐁이 내부에 담고 있는 폭발적인 힘을 암시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이 폭발이 물리적인 저항 없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정오>의 태국어 제목인 <악마의 손에 피어난 천국의 꽃>이 그의 영화에 대한 정확한 은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진짜 해피앤딩이 아닐까.

아무도 모른다



실제 일어난 사건에 의존하는 영화들은 최소한 “이게 말이 되는가”라는 투박하고 영민하지 못한 비판에서 자유롭다는 장점을 지닌다. 그러나 악의에 가득찬 이 질문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핍진성에 대한 거짓 질문의 역사가 자기 검열의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었던 영화 작가들의 근심과 일치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사실 모든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지 실재라는 영역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가? 물론 위의 거짓 질문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영화 고유의 실재를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모든 영화가 이것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영화적 리얼리티를 둘러싼 논쟁을 거짓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영화이다. 감독이 실제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유하는 순간 관객들은 영화가 감독의 선택에 의해 영화적 현실을 구축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순간은 영화와 현실이 서로를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윤리적 실재와 접촉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목적이 관객에게 윤리적인 고해성사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실재로 이 영화는 그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해석과 그에 관련된 법적 처벌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으며, 동시에 관객들에게 이 비극적 사건의 죄를 묻지도 않는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언술은 두 가지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사건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가져오는 윤리적인 감쌈이며 다른 하나는 영화 속 인물들의 변화가 가져오는 비결정적인 순간의 모호함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모른다>에 있어서 실재로 일어난 사건은 참고 대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이 던지는 질문이 이 작품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참혹한 사건을 애써 부정하는 시도에 그친다고 폄하하는 것도 부당하다. 이 사건은 그림차처럼 영화에 드리워져 있다. 아키라, 교코, 시게루, 유키. 이들 남매 모두는 희생자이지만 희생자들이 공유하는 연대의 감정에 묶여 있지는 않다. 이 영화가 원했던 것은 일본 사회가 그 사건을 접했을때 담론화 되었던 자괴적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대신 이 불완전한 공동체를 공고하게 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계속 등장하는 긍정적인 계기들이다. 결국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 영화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즉 사건에 대한 관객들의 선입견이 영화적 리얼리티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 역할의 YOU를 캐스팅하면서 감독은 그녀가 ‘긍정적인 무책임함’을 보여줄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의 바램대로 그녀는 최소한 영화 속에서는 자신의 윤리적인 책임을 미끈하게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비극적 사건에서 긍정성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영화는 반복을 통해 부재의 흔적을 보여준다. 영화가 1년에 걸쳐 만들어 진 것이 부재의 흔적을 필름 속에 새길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된 것일까.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은 아이들의 키가 크고 머리가 자라고 목소리가 변하는 것을 보며, 벚꽃이 피고 지고 나무와 풀이 자라고 사람들의 옷이 변하는 것을 본다. 이것은 시간과 자연이 가진 긍정적인 힘이다. 자연은 양립 불가능함을 상연하진 않는다. 자연 만이 선택의 순간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긍정적인 것은 자연 그 자체와 사회적인 것이 자연에 가까워지는 순간이 주는 충만함에 있다. 그때 영화는 묘한 긍정의 향기를 뿜는다. 반면에 집주인의 애완견이 인간에게 완전히 종속될 때 그녀는 아이들에 대한 윤리적인 결정을 내릴 능력을 상실한다.

이 영화의 디테일한 묘사와 실화 참조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게 했다는 평가는 부당하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찍은 경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애써 이 영화를 설명하는 것이 궁색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아무도 모른다>를 완벽한 픽션으로 재구성해 내었으니까 말이다.